산으로가는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개략도 보기

◀마대산 정상에 서면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마대산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백두대간이 선달산을 거쳐 고치령과 마항치 사이에 형제봉을 일으키고 북쪽으로 가지를 쳐 옥동천과 남한강에 이르는 지맥에 솟아있다.
사실 마대산이란 이름보다는 희대의 방랑시인 김삿갓묘가 있는 산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마대산 서쪽 아래로는 고씨동굴이 있고 동굴 앞을 흐르는 남한강의 수려한 풍광과 북으로 흐르는 옥동천이 남한강으로 합수되어 보기드문 비경을 연출한다.
동쪽으로는 김삿갓(난고 김병연)이 "무릉계"라고 칭한 곡동천이 옥동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무릉계는 최근 들어 "김삿갓계곡'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은 대중교통이 편리한 영월쪽 하동면 대야리와 옥동리에서 많이 올라갔으나 지금은 김삿갓묘를 관광상품화 시킨 영월군의 노력으로 대부분이 와석리 노루목에서 마대산과 처녀봉(930m)을 돌아 김삿갓묘로 내려서는 원점회귀가 주로 이루어진다. 특히 와석리 노루목 일대는 천재시인 김삿갓 유적지와 시비공원이 있고 영월의 산수미에 반한 김삿갓이 마대산 안쪽 골짜기인 어둔리에서 수년간 정착하며 살았다고 한다.
주능선 곳곳으로 시여가 트이는 곳에서는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과 소백산, 형제봉, 선달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다. 




1.노루목(김삿갓묘)-처녀봉-마대산-남릉-김삿갓묘



*대중교통:영월시내버스터미널 앞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옥동리 경유 김삿갓발 시내버스 이용 (1일 6회)
*자가운전:
1.중앙고속도로 서제천IC→ 5번국도→ 제천→ 영월방향 38호 국도→ 영월→ 고씨동굴방향 88번 지방도→ 대야리에서 88번 지방도로 우회전→와석리
2.영월읍에서 88번 지방도이용 고씨굴→ 옥동리경유→ 와석리 김삿갓상회→ 김삿갓계곡 → 민화박물관→ 김삿갓묘 

풍자와 해학의 시선 감삿갓이 잠든 마대산

*일시:2005.9.4(우정산악회에 얹혀서)- 오전 비, 오후 맑음
*산행코스:노루목(김삿갓묘)-처녀봉-마대산-남릉-김삿갓묘
*산행상세:
노루목주차장-(5분)-시비공원 등산안내판-(6분)-선낙골, 어둔이골 갈림길-(15)-갈림길(선낙골,사면길)-(23분)-658봉-(22분)-처녀봉(930m)-(3분)-댓마루마을 갈림길안부-(12분)-총각봉(1030봉 전망바위)-(22분)-마대산(1052m)-(8분)-맞대골 갈림길-(12분)-어둔이계곡 갈림길-(20분)-능선분기봉(좌측으로)-(20분)-계류-(15분)-어둔이계곡 합수점-(10분)-김삿갓 주거지-(20분)-김삿갓묘-(3분)-주차장
=== 순보행: 3시간 36분, 총소요: 4시간 30분 ===

나는 지금 청산 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만 오는가? === 난고 김병연 ===

조선후기 풍자와 해학의 시선 김삿갓(난고 김병연)이 누워 있는 곳,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방랑시인 김삿갓은 마대산 동쪽 기슭 노루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는 노루목의 양지바른 터에 그 뼈를 묻고 있다.
사실 마대산이란 이름보다는 김삿갓묘가 있는 곳이라면 더 빨리 그 위치가 가름될 만큼 "김삿갓묘"는 영원군의 관광상품이 된 곳이다. 김삿갓이 계곡미에 반해 "무릉계"라 불렀다는 곡동천을 따라 들면 노루목 김삿갓유적지가 나타난다. 이 골짜기는 "김삿갓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마대산 산행은 일반적으로 노루목 김삿갓묘를 기점으로 어둔이계곡을 경유하여 정상에 오른 후 처녀봉을 거쳐 선낙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정석화 되어있고 3~4시간 정도의 짧은 산행 후 김삿갓 유적지를 둘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 희대의 천재시인 난고 김병연이 한때 터를 잡았던 노루목에서 마대산 오르는 발품을 판다.
비록 죽장에 삿갓 쓰지는 않았지만, 마치 나 자신이 방랑시인이나 된듯....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노루목 너른 주차장에서 노루목교를 건너서면 왼편으로 김삿갓묘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오른다. 이른 바 이곳이 김삿갓 유적지로, 곳곳에 그의 시와 조형물이 있는 시비공원이다. 김삿갓묘는 시비공원 오른편 산비탈에 있고 자연석으로 상석과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라고 세긴 비석을 세워두었다.
지하에 있는 난고선생은 후세에 이렇듯 많은 사람이 그의 무덤을 기웃거리는 것에 대해 결코 탐탁치 않으리라. 일각에서는 처, 자식을 두고 방랑벽으로 세상을 떠돈 김삿갓의 생애를 두고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아무튼 풍자와 해학이 베어있는 그의 천제성은 인정하는 바이다.

김삿갓 시비공원에서 마대산 오르는 길은 무덤에서 되돌아 나와 목장승과 식수터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든다. 길 오른편의 당집 앞으로는 각기 소원을 비는 작은 나무팻말이 주렁주렁 걸려있어 이색적이다. 당집 앞으로 오르는 시멘트 길은 "버들고개 민박집"으로 오르는 길이다.
마대산 오르는 초입으로는 큼직한 등산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 난 넓직한 길을 따라 잠시 나서면 자그마한 시멘트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다리 건너 몇 박자국 후 왼편으로 희미한 사면길이 나타나고 초입으로 표지기가 걸려있다. 이 길은 어둔이계곡 남쪽 능선으로 올라붙어 김삿갓 주거지를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 도는 능선산행길로 초입은 희미한 편이다.
◀1030전망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와석리
김삿갓묘를 출발하여 5~6분 정도 나서면 어둔이계곡과 선낙골로 갈라지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왼편 자그마한 폭포 아래 계류를 건너는 길은 김삿갓 주거유적지 방면으로 가는 길이고, 선낙골은 오른쪽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른다.
계류를 끼고 오르는 시멘트 길을 10분 정도 올라서면 왼편으로 절집 비슷한 건물이 보이고 초입으로는 차단막이 설치되어있다. 이곳을 지나 2~3분만 더 나서면 오른편으로 "김삿갓등산로"라 적힌 작은 아크릴판이 붙어있는 사면 갈림길이다. 계속되는 시멘트 길을 따르면 선낙골을 따라 오르는 길이 된다.
여기서 시멘트 길을 버리고 우측 숲길로 접어든다. 초입에는 수십개의 알록달록한 표지기들이 걸려있다.
숲을 뚫고 들어가면 이내 가파른 사면길이 시작된다. 처녀봉 오르기 위한 본격적인 산길은 초장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된비알이다. 지능선을 두어 번 건너 타고 올라서면 "처녀봉 1km"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한 차례 힘을 더 쏟아붓고 올라서면 바로 앞으로 처녀봉이 올려다 보이는 좁은 공터의 무명봉에 닿게 되는데 개략도 상의 658봉쯤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가파름은 숨을 죽이게 되고 유순해진 능선을 따라 2분 정도 나서면 왼편 아래 선낙골쪽 일월암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이정표는 왼편 길로 "김삿갓묘역 1.2km"를 알리고 있다.
이 갈림길을 지나 10분 가량만 더 올라서면 큼직한 노송 두 그루가 서 있는 처녀봉(930m)이다. "처녀봉"을 알리는 깨진 아크릴판 아래로 "박물관부지 1km, 약수터 1.1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처녀봉은 북쪽으로 갈라지는 능선 분기봉으로 기대치 만큼의 조망을 보여주지 못한다. 서쪽 소나무 숲 사이로 1030 전방바위봉과 마대산 고스락을 어림해 볼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처녀봉에서 서쪽 아래로 한 차례 떨어지면 오른쪽으로 산제당터를 지나 옥동리 댓마루마을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는 안부다. 바로 앞 1030봉 전망바위를 "총각봉"이라 표기한 아크릴판이 있다.
하긴 처녀봉이 있으면 총각봉이 있어야 하는게 당연한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처녀봉... 총각봉... 처녀봉(?)... 총각봉(?)... 참 재미난 이름들이다.
이 안부를 지나 10분 가량 올라서면 전망바위 턱 아래에 있는 이정표를 만난다.(전망바위 20m, 처녀봉 0.9km) 바위전망대가 있는 1030봉 역시 능선분기봉으로 바위 위에 올라서면 남동쪽으로만 조망이 트인다. 바로 아래로 와석리 일대와 그 건너로 아득하게 백두대간 선달산쪽이 아스라히 펼쳐진다. 하지만 듬성듬성 돌출된 바위 상단부라 발디딤에 조심해야 하고 여러 사람이 조망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전망바위 뒷편을 돌아내려 남서쪽 능선을 따라 마대산까지는 거의 평지성 능선길이라 크게 힘들이지 않고 25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전망바위를 지나 잠시만 나서면 길은 능선 날등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나 있다. 두 길은 잠시 후 능선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개략도엔 이 일대쯤에서 왼편으로 선낙골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이 있는 쌍소나무가 표시되어 있지만 본인은 주능선에서 오른쪽으론 난 길을 타고 돌아서 인지 선낙골에서 오르는 길을 미쳐 보지 못했다.
마대산 올라서기 직전으로 왼편 아래 방향으로 로프가 쳐진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어둔이골 김삿갓주거지를 거쳐 마대산 오름길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길이다.(이정표: 마대산 0.1km, 김삿갓주가유적, 전망대 0.9km)
마대산은 이 갈림길에서 직진방향 100m,  3~4분 정도의 거리다. 삼각점과 표석이 있는 정상부에선 영월 고씨동굴방면으로 시원한 조망이 제공된다. 산과 마을을 아우르며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의 모습도 볼만하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올라왔던 방향에서 직진길인 남서쪽 능선을 따른다. 이 길은 많이 이용되지 않는 듯 잡목이 걸리적 거리긴 하지만 뚜렷한 편이다. 10여분 가량 유순한 능선을 이으면 오른쪽 숲 사이로 큼직한 암봉이 보이는 갈림능선으로 개략도의 맞대골 갈림길이 된다.
개략도에는 오른쪽 건너 바위암봉과 주능선 사이의 안부에서 대야리로 내려서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우거진 수풀로 인해 그 초입을 찾을 수가 없다. 건너로 보이는 바위봉 아래로는 큼직큼직한 바윗돌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고 바위봉 위로는 올라설 수가 없다. 대신 바위 바로 아래로 시야가 트이는 곳에 서면 건너로 소백산 형제봉을 비롯한 연릉들의 조망이 가능하다.

능선분기점까지 되돌아와 3분 정도 더 나서면 다시 능선분기봉이 되고 길은 왼쪽 아래(남동쪽)으로 가파르게 떨어진다. 10분 후 내리막 길에서 왼편 비탈쪽으로 갈라지는 사면길을 만나게 되는데 어둔이계곡으로 내려서는 길로 추측된다.(개략도상의 어둔이재라고 판단되기 보다는 내리막 능선의 갈림길 정도로 여겨짐)
이후 나지막한 산봉 하나를 넘어 뚝 떨어져 내리면 잘록이 안부에 이르게 된다. 이 지점이 어둔이재로 여겨지지만 좌우로 빽빽한 수풀사이에서 내려서는 길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계획대로라면 어둔이재에서 왼편 어둔이계곡으로 내려서려고 했지만 그 무성한 잡목 숲에서 내려서는 길은 결국 찾지 못하고 계속 능선길을 따르기로 한다.
사실 지도도 없이 손바닥만한 개략도 한 장으로 여름 숲을 헤쳐 나가기는 다소 무리가 될 수 도있다. 특히 마대산에서 베틀재쪽으로 이어지는 남릉방면은 길도 희미한 편이고 끊어지는 곳도 간혹 나타난다. 가끔 국유림을 알리는 시멘트기둥과 빛바랜 표지기 두어 장을 만나는게 전부였다.

계속되는 능선을 따라 올라서면 능선 한 가운데로 4~5m 정도의 큼직한 선바위 옆을 지나게 되고 다음에 나타나는 산봉에선 왼편으로 꺽여 내려가는 뚜렷한 길을 따라 내려서게 된다. 개략도의 표시대로라면 직진방향 능선으로 산불감시초소가 가깝고 베틀재가 얼마 되지않는 거리다. 즉, 직진하는 능선방향은 배틀재 방면이 되겠지만 길은 왼편으로 떨어져 내리는 길이 뚜렷한 편이다.
그 길을 따라 20분 가까이 내려서면 계곡이 가까워지고 오른쪽으로 이깔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이후 계류를 따라 내려서게 되는데 계류에서부터는 잡풀이 덮여있어 길 흔적이 희미해지고 간혹 이끼 낀 축대의 흔적이 있는 옛 집터자리를 지나게 된다. 계류가로 난 묵은 길을 더듬어 15분 가량 더 내려오면 왼편으로 출발지에서 김삿갓주거터로 가는 넓직한 길로 올라서게 된다. 처음 출발할때 만났던 선낙골, 어둔이골 갈림길과 김삿갓 주거터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김삿갓묘까지는 10분 정도 큰 길을 따라 내려서면 된다.
◀김삿갓 주거유적
마대산 산행은 강원도 영월땅 김삿갓의 흔적을 찾아 온 길이라 그가 머물렀던 집터를 들르지 않는다면 삿갓어른이 얼마나 섭섭해 할까?
발길은 어느새 계류를 거슬러 김삿갓주거터쪽으로 되올라간다.
15분 만에 만나게 되는 삿갓어른 주거유적지는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길손을 맞는다.
집 앞으로는 맑은 계류도 졸졸졸 흐르고...

조부의 불충을 비웃는 글로 과거에 합격한 것이 가슴에 한이 되어 큰 삿갓 아래서 하늘을 보지 않았다는 김삿갓... 김립(金笠)
이곳 영월땅 노루목 외진 골짜기인 어둔이골에 묻혀 은둔의 세월을 보내기엔 그의 꿈과 방랑벽이 너무도 컷던 탓일까? 하여 40여년 세월 죽장에 삿갓쓰고 주유천하하며 숫한 일화를 남긴 난고 김병연!
하루하루 숨막히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삿갓시대의 먼먼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불과 채 1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비록 그가 잠시 머물렀던 주거지는 예전 것이 아니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집터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시혼이 외진 골짜기를 지키며 고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삿갓 생애
김병연(蘭皐 金炳淵) : 1807∼1863, 조선후기 시인, 방랑시인 김삿갓.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김. 주요시집 : <김립 시집(金笠 詩集)>
그는, 이름이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지만, 세상 사람들은 삿갓을 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삿갓'이라고 불렀고, 어느만큼 인정을 나눈 사이에서는 성(性)인 '김'을 붙여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김삿갓'이란 뜻인 '김 립(金 笠)'으로 주로 표기했다.
1807년(조선조 순조 7년) 3월에 한양성의 북서쪽인 경기도 양주군의 북한강이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인 1812년 12월에 서북 지방(평안도)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조정의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고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저항해서 일어난 이 난은, 단 10일 만에 청천강 북쪽 지역의 8개 군·현을 장악해 버릴 정도로 백성들의 큰 호응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는 정도였다. 이 때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그 8개 군·현 가운데 하나인 선천군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단 난군에게 항복하였다가 적진을 탈출했다.  그러나 항복한 뒤에 적을 위해 협력하고 탈출한 뒤에는 남의 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대역죄를 받아,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 때 다행히 할아버지를 뺀 나머지 가족은 목숨을 구했으나, 그는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가서 피해 살았다.  7세 때 가족이 다시 북한강변에 모여 살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죽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김병연만이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어 앞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김병연은 20세 때의 봄에 영월 관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응시해서 장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가을에 열릴 초시(생원시, 진사시)를 포기하고 곧장 한양으로 나갔다. 그는 한양에서 신분을 숨긴 채 2년간쯤 의도적으로 명문대가의 자식들을 사귀어 교유하면서 벼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실력이 출중한 그는 어렵지 않게 그 길을 찾게 되지만,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벼슬길은 그가 나갈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병연의 방랑길은 그런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러운 벼슬길에 대한 욕망을 다 털어 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자유인의 길이, 그가 택한 길이었다. 그의 시는 해학과 서정, 관조적 허무와 격물정신으로 규정된다. 부정과 불의에 부딪치면 해학은 풍자와 조소의 칼이 되고, 절경과 가인을 만나면 서정은 술이 되고 노래가 된다. 또한 인생을 살필 때는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지만, 사물들을 앞에 두었을 때는 햇살이 되고 바람이 된다.
그의 자유혼은 시의 소재나 형식에서 규범과 탈규범을 넘나들기도 한다.  한시의 전통적 방식을 거침없이 해체해서 파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한시를 음이 아닌 뜻으로 읽게 한다든지, 한글을 섞어서 쓰는 시들이 그런 경우가 될 것이다.
그는 1863년(철종 13년)의 봄에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현(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달천변에서 35년쯤의 긴 방랑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그곳을 죽음의 자리로 택한 것은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달천이 '적벽강'이라 부를 정도로 경치가 퍽이나 빼어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병연은 1천여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찾아졌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그것도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며, 그 속에 실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시들과 흥미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 시인·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을,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출처:문화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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