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산행은 늘 그랬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난해 봄까지
산문에 들어서면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하게 퍼덕였고
걸음은 푸른 하늘까지 날아 오를 듯 경쾌했었다.
살갓 스치우는 바람 한 점에도 감사했었고, 눈에 닿는 모든 자연이 경이로웠다.
몸이 가는 길과 마음이 가는 길이 하나 되지 못하는 작금의 산행
목적지를 잃었으니 결국은 의미 없는 걸음일 뿐이다.
저 길 끝으로 무언가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조차 남겨두지 못한...
번잡한 일상은 산에 들만큼 평온하지 못하지만 대간 길 한 번 따라가고마 했던 언약으로 길을 나선다.
무령고개에서 복성이재까지...
무령고개에서 한 비알 올라선 영취산이다.
이땅의 꾼들은 대간에서 금호남으로 갈래쳐 나간 꼭지점이라 의미를 두고 있는 봉우리다.
산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관심은 접은지 이미 오래다.
내겐 의미 없는 대간길이다. 영취산도 그저 봉우리 하나에 불과 할 뿐이다. 그저 몸만 걷고 있을 뿐이다.
산길 걷는 감흥조차 잊으니 다시 걷는 대간의 감동도 저만치 사라진지 오래다.
그저 건성건성 걷고, 습관적으로 셔터만 눌러댈 뿐이다.
사각 파인더에 보니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영취산에서 바라다 본 장안산이다. 금호남정맥의 시발점 이기도 한
들어서서 보는 산과는 달리 멀리서 바라다 보는 산은 참 편해 보인다.
백운산에 섰다. 이제 저 앞으로 웅장한 지리산 천왕봉이 모습을 드러낸다.(제일 뒷 봉우리 앞쪽은 삼봉산)
영취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온통 산죽으로 이어지는 길로 기억되건만 어느 고운 손길이 깔끔하게 정리한 대로로 변해있다.
백운산에 서면 너무 깊고 높아 뭇 산들의 시샘을 받는 지리산이 코 앞으로 다가온다.
천왕봉에서 반야를 이으며 길게 몸을 눕히고 있는 유장한 지리 능선이 거만떨고 있다.
이땅의 대부분 산꾼들을 지리산을 민족의 영산이니 뭐니 하며 떠 받들고 있다.
내도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지리산도 그저 하나의 산 봉우리에 불과 할 뿐이다.
지리산이 밉다.(쉿! 지리산이 들으며 몹시도 섭섭해 할라! 이건 비밀이다. 절대 발설하지 마랏!)
남들이 오매불망 하는 지리산이니 나 하나쯤은 별볼일 없이 여긴다해서 지리산이 지리산이 아닐수 없음이다.
백운산 역시 영취산처럼 묵직한 빗돌이 고스락을 누르고 있다.
빗돌 아래 넓은 헬기장에서 이른 점심이다.
이미 산아래엔 봄이 깊어 여름으로 치닫고 있건만 백운산정엔 이제 버들이 피어나고 개별꽃이며 산자고가 피어나니 여건에 따라서는 봄이 더딘 모양이다.
사람의 일도 그러하다. 더딘 봄 이제 오는가 했더니 계절은 봄을 훌쩍 뛰어 넘어 햇살 따가운 여름이다.
이정표는 길 잃은자의 등대이자 희망이다.
내 삶에서도 저렇듯 형형의 길잡이가 길을 인도한다면 반듯하게 걸을 수도 있으련만...
순수한 눈으로 산을 보고 세상을 보고 싶다.
보이지 않는 세세함까지 알고자 함은 병이다.
저 앞으로 봉화산이 보인다.
봉화산까지의 길은 착한 억새길이다.
걸어 온 길을 되짚어 본다.
삶의 길에서 가야할 길도 저렇듯 선명할 수만 있다면 잘못된 길 걷는자 어디 있을까
젤로 좋아하는 그림이다.
중첩된 산자락이 어깨 기대고 있는...
봉화산 철죽재로 유명한 바로 그 철쭉 군락지.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
결국 진실도 표현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직은 이른 철쭉이지만 이만큼이 어딘가?
저 고샅길 속에 빠져들면 마음마져 붉어질까?
어여 달려 가보자!
철쭉 고샅으로 들었건만 키를 넘는 철쭉밭에선 정작 제대로 된 그림을 볼 수 없다.
한 발 떨어져 보는 그림이 아름답 듯... 삶의 길도 제 3의 눈으로 보면 그리 못난 그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2008.4.28
무령고개-영취산-백운산-월경산-봉화산-복성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