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고 부친 남희백묘] 2015.10.18
 
풍수간산의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격암 남사고 선생의 부친인 남희백의 묘다.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 위치해 있다.
예전 왕피천 트래킹을 위해 두 어번 갔던 굴구지마을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굴구지마을과 수곡리 갈림길에서 왕피천을 따라 잠시 달리면 왼편으로 왕피천을 넘는 막금교가 보인다.
막금교 건너 천축산 초소를 지나 비포장길을 한동안 따라 올라가다가 민가 지난 지점에서 왼편으로 난 산길이 남사고부친묘 가는 초입이다.
초행이라면 찾아가기 꽤나 힘 들것이다.
 
사실 이번 답사 전에는 이런 곳에 남사고 부친묘가 있다는 존재조차 몰랐다.
아니, 소시적 역사교과서에서 남사고란 이름은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남사고에 대해 검색해 보니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은 것들을 새롭게 알게되었다.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별칭이 붙은 남사고. 유학자지만 역학,천문,지리에 두루 통달하였다고 한다.
이미 임진왜란, 동서분당싸움, 선조의 탄생와 남명 조식선생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전해지며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를 남긴 이인이라고 한다.
남사고 부친묘는 구천십장의 전설적인 자리로 높은 산에서 진혈을 찾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한다.
풍수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보는 필수 코스의 한 곳이라고 한다.
 
남사고 부친묘를 둘러보기 전에 미리 남사고란 인물과 그의 구천십장(九遷十葬)에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사고(南師古)는 영양 남씨로 조선 중기의 학자.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났으며, 평생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다.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하여 예언이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풍수학(風水學)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본관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구천십장(九遷十葬)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내용이라 옮겨 적어본다.
남사고는 아버지를 명당에 모시기 위하여 아홉 번 이장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을 찾았다. 이장 작업을 끝내려는데 한 총각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

“구천십장남사고(九遷十葬南師古)야 비룡상천(飛龍上天)만으로 여기지 마라. 고사괘수(枯蛇掛樹)가 이것 아니던가”

(아홉 번 이장하여 열  번째 장사지내는 남사고야,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명당으로 여기지 말라. 비쩍 마른 뱀이 나무에 걸려 있는 형상이 바로 이것 아니더냐?) 

남사고가 깜짝 놀라 다시 산세를 살피니 과연 죽은  땅이었다.


급히 그 총각을 쫓아갔으나 이미 간 곳이 없었다.
이에 남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는 필히 그 주인이 있는 법이니 평소 덕을 쌓지 않은 아버지를 억지로 명당에 모시려고 해도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무해지지(無害之地)를 찾아 이장하였다는 이야기다.


▲왕피천 하류의 막금교를 건너면 천축산 관리초소가 있고 그 옆으로 왕피천유역 생태, 경관보전지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천축산관리초소가 있는 걸로 봐서 천축산권역인 모양이다. 관리초소에서 인적사항을 적고 차를 타고 계속 산 속으로 들어간다.
차로 한동안 올라가면 황토집 민가가 나타나고 잠시후 갈림길이다. 2만5천 지형도에는 한티재로 표시된 지점이었다. 하지만 재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은 곳이다.

지형도상으로 보면 왼쪽은 천축산 가까이까지 임도가 이어지지만 꽤 먼 거리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임도가 계류를 넘는 지점으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이 지점이 중요 포인트로 계류 넘기 전 10여 m 전방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산길로 올라야 남사고 부친묘를 만날 수 있다.


▲계류엔 아담한 소도 있다.


▲길은 비포장이지만 25인승 미니버스가 다닐 만큼 넉넉하다.
버스에서 내려 산길을 걷다.


▲남사고가 부친묘를 쓸 만큼 좋은 터여서 인지, 지맥으로 몇몇 기의 무덤들을 지나쳐 오른다.
길은 그리 급경사는 아니지만 꾸준한 오르막이다.


▲10분 가량 산길을 올라서면 넓직한 무텀자리를 만난다.
무덤 바로 앞으로 비석도 갖추지 않고 봉분이 낮아진 무덤 하나가 인접해 있다.


▲둘레석과 높은 봉분이 있어 처음에는 여기가 남사고 부친묘로 알았건만, 진짜 남사고 부친묘는 이 무덤에서 20m 정도 더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비문은 세월의 때가 묻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물론, 까막눈이라 어려운 한자는 읽지도 못하지만...
나중에 검색해 보았더니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비문의 글씨는 "한성참군 영양남공구지묘(漢城參軍英陽南公矩之墓) 라는 것을 알았다.

숙부인오씨와 합장된 무덤이라는 것도 검색을 통하여 알았다.


▲무덤 뒤편에서...
이곳이 정혈처로 명당자리라고 한다.


▲일단 옛 사람에 대한 예를 갖춘다.


▲명당터 뒤편 20m 거리에 있는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부친인 남희백(南希伯)의 묘


▲이조좌랑 영양남공희백지묘(남사고 부친의 묘소이다)


▲비석 옆면. 이 비석은 1991년 다시 세운 듯하다.

▲비석 뒷면
까막눈으로 보니 당최 뭐라고 쓴건지...


▲이곳에서도 옛 사람에 대한 예를 갖추고


▲무덤 뒤에서 보다.
수목으로 인해 시야가 트이지 않는다.


▲무덤 뒤로는 오붓한 산길이 이어진다. 분위기 좋은 길이라 한동안 따라가 보다.

분위기가 좋아 걷고 또 걸어도 걷고 싶은 길 중의 하나이다.


▲다시 남사고 부친묘 앞에 있는 무덤터로 내려와 그늘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답사회에서 준비한 김밥과 족발 맥주 등등.
어느 눈 밝은 분이 마른 송이 하나를 노획하여 함께 나누어 먹기도...

▲남사고 부친묘 앞에 자리잡은 무덤



▲무덤자리에 대한 설명과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고 서로의 의견들을 제시해 보다.


이곳은 남사고의 지인(?) 묘라고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정혈처에 부친의 묘를 쓰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데...
일설에 의하면 격암이 그 정혈처의 명당자리를 잡아 놓고 거기에 산소를 이장하려고 올라 갔는 데, 당시는 아름들이 소나무가 불과 몇미터 앞도 안보일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데다가 때마침 오전에 안개까지 자욱하여 착오로 그 위 엉뚱한 곳에 썼다는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명당자리에서 본 조망.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안산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자리를 옮겨 남사고 부친묘 뒤편에 있는 무덤자리로 이동해 본다.


▲뒤편 무덤은 합장묘다.
혹자는 남희백공의 산소 위쪽에 산소인 이곳이 원 명당자리라고 하지만...


▲무덤 뒤편 맥이 시작되는 펑퍼짐한 둔덕(지형도상 238.9봉)에서 강의는 계속되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계곡가로 내려와 작은 소에 모여 손도 씻고


▲나오는 길에 들러 본 천축산 초소




▲저 골짜기 안쪽에 격암 남사고의 부친 남희백의 묘가 있었다는...
이 근처에 남사고 유적지가 가깝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함 들러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