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애삼존불 답사:2009.4.21

 

▲서산 마애삼존불상

마애 삼존불은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인 석가여래 입상을, 좌측에는 제화갈라보살 입상, 우측에는 미륵 반가사유상을 배치하였다. 두 입상에 하나의 반가상이 조각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이며, 좌측의 보살입상은 과거를, 중앙의 석가여래 입상은 현재를, 우측의 미륵 반가사유상은 미래를 상징하고 있는 불상 배치 방법으로 우리가 가장 흔히 볼수 있는 불상 배치인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중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불상으로 1958년 발견되었다. 당시 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표정으로 바뀌어 '백제의 미소'라 불리우던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를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불과 6년 후, 1959년 마지막 백제인이라 불리우던 홍사준(부여박물관장)은 인근 보원사터를 조사,발굴하러 오가던 중 마을사람이나 나무꾼에게 혹시 산에서 부처님 새긴 것이나 무너진 석탑을 본 일이 없느냐고 묻곤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면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마애삼존불 입구에 있는 서산관광안내도

 

▲계단길을 올라서면 불이문(不二門)
이 문을 통과하면 세상만사 들이 아닌 하나가 된다,
오른편으로는 예전 관리소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공사중...

 

▲입구에서 7~8분 계단을 따라 오르면 삼존불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는 1958년
그 전에는 주민들 사이에 이곳을 인바위(印岩)라 불렀다 한다. 아마도 바위에 부처가 세겨져 있어 그렇게 불렀던 듯

 

▲마애삼존불을 이루고 있는 바위 상단부

 

▲마애불의 미소는 빛의 방향에 따라 그 미소가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마애불의 처마 역할을 하고 있는 바위 상단부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봄빛 깊어진 용현계곡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 국보 제 84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