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봉에서 섬진강만 바라보다-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는 차창밖 풍경은 매화가 한창이다.
강따라 이어지는 구불텅한 모퉁이를 돌아 나설 때마다 산기슭 언덕배기를 하얗게 수놓고 있다.
섬진강은 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거늘
강나루 기슭의 낡은 마을에 활짝 피어난 매화가 조화를 부리니
초행의 성제봉을 찾는 마음은 들머리에 들어서기 전부터 달떠오른다.
이미 섬진강의 아름다움에 빠져 섬진강을 노래한 시인, 문인의 섬진강 정서를 몰랐다손 치더라도
섬진강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더디게 흐르는 정겨운 강줄기에 매료되었음을 고백한다.
이미 개발의 손길로 황폐해진 여타의 강들과 섬진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섬진강 까까이에 기대어 사는 정겨운 마을이며, 하얀 모래톱이 이룬 둔덕, 시누대 서걱이는 여울목,
섬진강을 빗어내는 산자락은 섬진강을 더욱 빛나게 하는 가장 한국적인 서경이다.
그래서 섬진강이 품고 있는 것은 다 좋다.
긴 겨울 칼바람 서러웠을 갈대밭에 봄바람 살랑이고
멈춘 듯 느리게 흐르던 섬진강은 지천으로 피어나는 매화 속에서 제 빛을 찾아가고 있다.
매화 지고나면 섬진강변은 분분한 벚꽃길로 화려하게 봄을 치장할 것이다.
입소문으로 익히 들어온 성제봉
섬진강을 한없이 굽어보며 걸을 수 있다던 그 성제봉과의 인연이 비로서 맺어지는 날이다.
노전마을 표석에서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청학사 오르는 길섶으로 막 피어난 매화가 먼길 온 길손 반긴다.
옅은 봄바람 스치울때마다 살풋 매화향이 전해진다.
매화향은 그윽한 맛이다.
향기란 그런 것이다. 너무 강하고 화려하지 않아 은은한 것.
자극적이라면 벌, 나비 쉬이 모여들긴 하겠지만 식상하기 쉬울 것이다.
사람도 그러하다. 곁에만 있어도 깊고 은은한 향을 풍기는 사람, 그런 향기를 품은 사람이 될 일이다.
온통 돌로 치장한 청학사를 지난다.
서늘한 기운 감도는 긴 대숲을 빠져 나가면 길은 꼬장꼬장한 된비알로 변한다.
대개의 산길은 격한 오르막을 만나면 이리저리 굽돌아 오르는게 정석이거늘
산죽 고샅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치의 아량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오름의 끝을 가름할 수가 없다.
하늘이라도 한번 볼 량이면 짧은 모가지를 한껏 뒤로 젖혀야 겨우 산과 하늘의 경계를 볼 수 있다.
이 길 끝에서 섬진강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면 되내려와 꽃놀음이나 하고 싶을 지경이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길 끝에 희망이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가시밭인들 기꺼이 헤쳐 나갈 터이지만
사람의 길에선 때로 한가닥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길에서 갈팡질팡 할 때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거친 오르막에서 빈약한 체력을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야 겨우 하늘이 열린다.
성제봉은 그렇게 힘겨운 통과의례를 거친 자들에게만 비로서 제 모습을 허락한다.
성제봉에 서면 지리천왕부터 이어지는 지리주릉이 건너다 보이고 백운산 스카이라인이 선명하지만
눈은 섬진강과 드넓은 악양벌로만 향한다.
성제봉에선 시시콜콜 산을 캐는 일 따위는 필요치 않다. 발 아래 섬진강 하나면 충분하다.
섬진강과 성제봉은 한 몸이다. 게다가 초록으로 치장하는 악양벌이 넉넉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성제봉의 유명세가 결코 허명이 아님을 비로서 실감한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기진했던 체력이 생기를 찾고 고단했던 발품은 이미 남의 것이 된다.
성제봉 주릉을 따라는 길에선 섬진강이 주인공이고 밑그림이 된다.
산행 내내 섬진강만 보며 걷는다.
낮은 산자락엔 이미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건만 성제봉을 휘감아 도는 봄바람은 아직 맵싸하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겨울 끝자락이다. 손끝이 시려온다.
바람피한 산봉 아래 어느 망자의 무덤가에 점심상을 차린다. 주거니 권커니 산정이 오간다.
발빠른 걸음도 뒤쳐진 걸음도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걸망 속 정을 나누는 시간이다.
고수레 음식을 기다리는 까마귀 두 마리의 기다림이 처연하다.
너른 헬기장 아래로 철쭉 군락지가 펼쳐진다.
꽃이 없더라도 길만으로 아름다운 곳.
섬진강이 있어 충분히 아름다운 이 길에 붉은 철쭉 분분하게 피어오르면 가히 환장하지 않을 이 뉘 있으랴.
아슬하게 허공을 잇는 신선대 구름다리에서 올려다 보는 성제봉은 이제 가뭇하다.
까까워진 악양들은 비로서 푸르러 진다.
봄기운에 젖어든 강자락의 유연한 에스라인이 더욱 매혹적이다.
깍아지른 절벽을 내려서면 길은 솔향기 짙게 깔린 솔숲길이다.
편안한 길, 아껴가며 걷고 싶은 길이다.
통천문이라 이름지어진 좁은 바위틈을 빠져 나가면 속세는 한층 가까워진다.
일행들이 날머리로 향했을 최참판댁 갈림길을 지나 한고비 오르내리면 고소성이다.
아직도 산 욕심 버리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스럽지만
성제봉 산행에서 고소성을 빠트리는 것 또한 성제봉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깔끔하게 단장된 고소성에선 낡고 오래된 것이 그리웁다.
고소성에선 섬진강 물돌이가 바로 코 앞이다. 풍요의 악양벌과 은빛 모래톱이 어울어진
넉넉하고 평화로운 풍경 앞에선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금빛 노을이 긴 띠를 이룰 섬진강을 기다려 보고 싶다.
매화향 깊어진 최참판댁 문전을 어슬렁거린다.
내려선 저자거리에선 한 사발 가득 담긴 섬진강을 마신다.
-2008.3.12 한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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