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좋은 날 - 천령산]
▲수목원 전망대에서 본 매봉~향로봉
칠월의 산하는 온통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단색의 물결이다.
윤슬같이 맑고 투명한 바람이 부드러운 능선을 넘나들 때마다 산줄기도 파도처럼 일렁인다.
연일 계속되는 장마비가 시퍼런 서슬을 들이대며 전국 곳곳에 게릴라성 집중호우를 쏟아부으며 맹위를 떨치는 시기. 그 장마의 틈새를 요행히도 피한 착한 날씨 속에서 천령산 오르는 길은 바람의 천국이다.
7월의 후끈하고 습한 바람이 아니라 햇볕에 잘 말려진 보석처럼 빛나는 바람이다.
바람결이 한 번씩 숲을 흔들 때마다 참나무 이파리는 일제히 몸을 뒤집으며 숲빛을 바꾼다.
능선을 넘나드는 쿨한 바람. 바람불어 좋은 날.
숲에 들어 길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다.
경북수목원(구 내연산수목원)에서 천령산 오르는 길은 이미 수도 없이 오르내린 친숙한 길이다.
한무리에서 1년에 한 번씩 있다는 단합대회를 겸한 산행지가 천령산으로 잡혔으니 어울렁더울렁 함께 그 길을 걸어볼 일이다. 수목원에서 잘 정돈된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이내 사방이 훤히 트이는 전망대다.
지난밤 흉흉하던 비바람이 씻어낸 산하는 단색의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저 멀리 비학산에서 구불구불 이어온 산줄기는 괘령산을 넘고 향로봉, 내연산쪽으로 유연하게 흐른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역동적인 산줄기는 말간 하늘아래 산과 하늘의 경계를 선명하게 구분 짓는다.
푸른 파도 넘실대는 동해바다 월포쪽도 한 편 그림이다.
이태 전 오늘처럼 맑은 날을 택일하여 이 전망대에 앉아 션한 맥주잔을 기울이던 옛 산벗들과의 오롯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문득 그들의 근황이 궁금타.
수목원 탐방로란 이름을 내 걸고 산허리를 애돌아 가거나 때론 능선을 곧장 오르내리며 삿갓봉, 천령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말 그대로 산책로처럼 편안하다.
쨍쨍한 여름 햇살 피해 숲그늘 드리워진 길이다.
그 농밀한 숲의 여백을 비집고 들어온 빛이 귀히 여겨질 지경이다.
길은 산길과 탐방로가 수시로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장마기간 중 보기드믈게 하늘 좋은 날 천령산이 파란 하늘을 이고 있다
지난해 이 탐방로 개설을 위해 포크레인이 파헤치고 쓰러뜨렸던 숲은 불과 1년만에 오롯한 산길로 변해있다.
좀더 많은 세월이 지난다면 파헤쳐진 이 산길도 분위기 좋은 숲길로 변모하여 좀더 친근하고 편한 길로 우릴 맞아줄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자연이 얼마나 신통방통한가를 세삼 깨우치게 된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훼손된 숲이지만 그 숲은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알고 있다. 실로 자연의 복원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당장 눈 앞에 거슬린다고 그리 호들갑을 떨거나 필요 이상의 비분강개는 다분히 소모적인 일이다.
산이 그러하듯 사람의 일도 때가 되면 자리를 찾아 자연스런 융화를 이룰 것이고, 그렇게 산처럼 스스로 치유될 것이다. 길 위에서 자연과 시간이 가르쳐 주는 단순한 진리를 얻는다.
문득 왁자했던 일행들이 모두 앞서 갔는지 홀로 한적한 길 위에 놓여진다.
그 길에서 한없는 평온과 자유를 얻는다.
느릿하게 걷는 행복에 빠져 길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천령산이 가까워진 된비알 하나 올라서자 앞섰던 걸음들이 달콤한 휴식에 망중한이다.
무심히 걷는 걸음을 불러 세운 그들이 커피 한 잔을 권한다.
이 여름 산 중에서 한 모금 마시는 냉커피 한잔은 그 어떤 음식보다 보배로운 산중호사다.
쉴 만한 산길 어느 곳에서든 불쑥불쑥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내 놓는 그네들의 등짐은 함께 하기 위한 나눔의 보물상자다. 내 알량한 등짐 속엔 그들에게 권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등짐 속엔 내 한 몸 챙기기 위한 욕심들로 가득한 탓이다.
천령산을 지나 청하골로 빠져드는 음지밭뚝 길에선 그 풍요롭던 바람이 죄다 어디로 숨었는지 후텁하다.
귀한 것은 늘 곁에 머무를 수 만은 없는 모양이다.
한 줄기 바람이 몹시도 그리웁다.
급경사 내리막으로 떨어진 청하골은 긴 가뭄 끝에 만난 물의 풍요를 빌어 소란스럽다.
거칠게 흐르는 물소리가 바람을 대신한다.
▲강정민추모비
젊은 날 한때 산에 대한 열정으로 청하골을 찾을 때마다 하룻밤 지새우곤 했던 캠프사이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건만 주변은 잡초만 무성하다.
옛 산친구를 위해 세워두었던 추모비(고 강정민추모비)가 길 섶에 쓸쓸히 앉아 무상한 세월을 일깨운다.
벌써 2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지났건만 기억 속 그는 여전히 20대 청년의 나이로 오가는 산객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날 요절한 그의 슬픔은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오랜만에 연산폭도 들러 본다.
제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듯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줄기는 바위라도 깨뜨릴 듯 위협적이다.
장마탓으로 불어난 물줄기는 옅은 황토빛이 섞여 있는가 하면 물흐름이 잠시 숨을 돌리는 소는 간장빛이다.
때론 격하게 때론 느리게 아래로만 흐르는 물줄기 따라 타박타박 걷는다. 아껴 걷고 싶은 길이다.
채 다섯시간 못미친 산길.
날머리인 보경사에 도착했건만 아직은 뜨거운 햇살 정수리로 내려 꽂히는 짱짱한 여름 한낮이다.
주차장 옆 스마일식당에서 비빔밥 점심 한 그릇이 꿀맛이다.
한무리에서 준비한 뒷풀이 순서에 따라 여흥은 고조되고 그렇게 여름은 추억으로 쌓인다.
*흔적:경북수목원-천령산-연산폭-보경사 === 2009.7.10 한무리와 함께 ==
▲천령산 우척봉
▲음지밭뚝 내림길 한 켠으로 빗겨있는 소나무 전망터
▲음지밭뚝 전망터에선 동해가 지척으로 보인다.
▲관음폭
▲연산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