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너울 춤추는 겨울산 [계방산]

▲병곡휴게소 일출


희붐한 바다 저편으로 환상적인 자연의 쇼가 진행중이다.
금방이라도 터질듯 둥글게 달아오른 불덩이가 불쑥 세상을 밝힌다.
그 불기둥 속으로 범선 한 척이 빨려 들어가 이글이글 녹아내린다.
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은 순식간이다.
영원히 곁에 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마져도 세월 앞에선 잊혀지기가 일수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계방산을 향하던 버스가 동해안 병곡휴게소에 멈춰선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일출시간이다.
부랴부랴 카메라 챙기고 바다 가까이로 달려간다.
마른 들풀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해는 찬란하다 못해 애잔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이다.
환상이다.
저토록 선명한 오메가를 만난 것이 기억에 있었던가.
산행길 덤으로 얻은 일출로 기분 좋은 출발이다.
찬바람 흉흉한 바다에서 시린손 녹여주는 온기있는 커피 맛도 일품이다.


 


▲운두령에서 계방산 등산로 초입

아득한 강원도의 준령을 넘어 도착한 운두령
고개가 얼마나 높으면 구름머리라는 운두(雲頭)령일까.
평창과 홍천을 잇는 하늘만큼 높은 고개마루까지 차로 올랐으니
정상까지는 담박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남한에서 차로 넘는 고개로는 두 번째 높다는 운두령(1089m)


휴일이면 인파차파에 시달렸을 고단한 고개를 뒤로 하고
침목계단을 몇 걸음만 올라서면 세상은 이미 발 아래다.
운두령 건너 보래봉, 회령봉으로 이어지는 소위 한강기맥이란 산줄기가 아득한 물결처럼 일렁인다.
오른편 위로 이미 계방의 부드러운 등성이가 시야권 안에 들어오니 오늘 산행은 거저먹는 셈이다.




완만한 등성을 따라 신갈나무 숲길로 접어든다.
잎새 하나 거두지 못한 나목이 맨 얼굴로 멀뚱거린다.
겨울산은 자신의 속 살을 한 점 가림없이 기꺼이 내어준다.
당당하고 찬란한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존재감이 더욱 선연하게 도드라진다.
앙상한 겨울 나무의 여백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은 눈이 시릴만큼 푸르다.



껍질에 희끗희끗한 무늬를 새겨넣은 물푸레나무와
붉은 표피가 겹겹으로 일어나는 거제수나무가 뒤엉켜 자라는 숲길에서 아이젠을 건다.
비로서 어눌하던 걸음이 안정을 찾고, 갑자기 걸음은 용감해진다.
오득~오득~ 발밑으로 전해오는 감각에 걸음은 신이난다.


▲목재데크가 있는 1492봉 전망대


쉼터를 지나면 계방산 깔닥고개로 불리는 긴 오름이 시작되지만 그리 거칠지는 못하다.
계방산의 산세가 워낙 유순한 터라 상대적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마에 김이 모락모락 날 즈음 시원스레 하늘이 열리는 전망대에 올라선다.


▲사진 가운데가 설악산 - 맑은 날씨 덕분에 선명

 와~~~~웃 탄성이 절로 난다.
사방천지간으로 파도처럼 너울지는 첩첩의 산줄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덩실덩실 어깨춤추며 이리저리 휘돌아치는 한 판 춤사위가 펼쳐진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산과 산,  그 너머의 또 산과 산들이 벅찬 감동이다.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는 못하지만 크고 작은 강원도의 고봉들이 죄다 시야권 속에 있다.


▲왼쪽 소계방산과 오른쪽 너머로 오대산

전망대 안내판 속에 그려진 설악산, 가칠봉, 오대산을 찾아보는 맛도 솔솔하다.
이토록 청명한 날씨 속에 겹겹의 산을 꼽아볼 수 있다는 것, 게다가 기온마져 산행에는 딱이다.
역시 아침 일출의 예견이 맞아 떨어지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전망대 아래 헬기장 너머로 계방산 정상부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바람 피한 넓은 터에 옹종히 앉아 함께 나누는 점심.
비록 싸늘한 김밥 한덩이가 전부지만 반찬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산그림이다.


▲계방산 정상

 

 






▲바람의 나라 선자령 풍력발전단지까지 선명하게 조망


▲발왕산

전망대에서 코 앞으로 보이는 계방산 정상까지는 단숨에 닿을 것 같았지만 20분이나 소요되었다.
맵싸한 바람살에 손끝, 발끝 시리지만 가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충분한 보상이다.
멀리 설악산, 구룡령, 오대산을 거쳐 노인봉, 황병산, 대관령으로 남진하는 산줄기
살아 꿈틀 거리는 듯한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한 눈에 아우를 수 있으니
계방산이야말로 백두대간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긴 조망을 끝으로 산을 뒤로 하는 시간은 늘 아쉽다.
능선을 따라 주목삼거리에서 노동계곡으로 내려선다.

 







 

두터운 얼음장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봄은 이미 물 속 낮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제 아무리 거친 겨울이라 한들 봄을 이기는 재간 있으랴
겨울이 혹독하면 혹독 할 수록 맞이할 봄은 찬란할 것이다.





▲이승복생가터

이승복생가터를 지나 한길로 들어서자 햇빛에 반사된 눈길이 온통 은빛으로 빛난다.
눈이 부시다.

사람사는 세상에서 길이 끝나고 산행도 끝났건만
마음은 아직도 산 기슭을 어슬렁 거리고 있다.



무시로 달려와 품에 안기고 싶은 산
산자락 어느 모퉁이에 서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행복이 되어버린 시간...
산에서도 산에 목마르고 그립다.


송어회 한 접시에 옥수수 막걸리 한 순배로 계방산 짧은 발품 마무리한다.
산을 위해 건배~~~


*흔적: 운두령-계방산-주목삼거리-노동계곡-이승복생가터-아랫삼거리(2006.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