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약산] 2011.10.9
죽전-죽전고개-재약산-철구소
▲물매화 -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 산들늪 억새 숲 사이에 지천으로 피어 있다.
산들늪엔 물매화가 한창이다.
키 작은 억새 사이로 환한 웃음짓는 얼굴에 취해 사경을 헤멜 지경이다.
물매화 뿐만 아니다. 긴 꽃대에 덩그러니 보라색 머리만 틀어 올린 산부추, 귀티내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용담도 지천이다.
재약산 사자평엔 구절초, 쑥부쟁이를 비롯해 쓴풀, 꽃향유등의 가을꽃이 때를 만났다. 하늘거리는 억새 숲에 빠져 그 예쁜 것들과 노닥거리느라 시간을 잊는다. 4시간 정도면 족할 산길을 꼬박 8시간 동안 그 길에 머물렀다.
▲붉은서나물, 여뀌, 싸리꽃, 개쓴풀
▲용담도 제 철을 만났다.
시내 모산악회에서 고창 선운산을 간다기에 미리 신청해 두었다.
산행 당일 약속장소에서 버스에 올랐더니 이게 웬걸...
좌석은 이미 만석상태이고 일부는 서서갈 형편이다. 어째 예약할때부터 건성건성 전화를 받는 것 같더니 결국 이모양이다.
그들은 좌석엔 개의치 않고 무조건 타라는 식이다. 고창까지는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그 먼길을 서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산악회 임원진에게 자리를 양보 받는다 해도 불편한 하루가 될 것이다.
뒤에 도착한 몇몇 사람도 이런 황당한 처사에 어이없어하며 발길을 돌린다. 새벽부터 서둘러 나섰지만 일이 이지경이 되고보니 씁쓸한 마음이다.
하여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이었지만 결정은 너무 싱겁게 내려 버린다. 이맘때쯤이면 신불산 억새가 딱일 것이다.
등억리쪽은 휴일이라 복잡할 것같아 한적한 청수골을 들머리로 단조성방면으로 진입할 계획으로 배내골을 향해 달린다.
언양시장에 들러 곰탕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제법 묵직한 맛이 난다.
▲재약산 사자평 건너로 향로산으로 연결되는 죽전고개 능선과 그 뒤로 영축산. 죽바우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중첩을 이룬다.
신불산으로 향하는 긴 대열이 꼬리를 무는 배내고개엔 이미 차량으로 넘쳐난다. 오늘이 일요일임을 실감한다.
배내고개에서 잠시 휴식후 배내골로 내려선다. 애초 계획은 청수골이었지만 죽전마을에서 사자평으로 올라서는 몇몇 산객들의 뒷모습에 즉석으로 산행계획이 바뀐다. 죽전에서 재약산 오르는 길은 아직 미답이 길인지라 그 길에 대한 궁금증때문이다.
가야할 길에 얽메이지 않고보니 이렇듯 계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경망스럽긴 하지만 내가 걷고자 하는 길에 대한 자유로움이다.
그렇게 길에 대한 궁금증 하나로 아무 대책없이 산을 오른다. 참으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걸음이다.
그 길에서 내 삶의 길도 이처럼 쉽게 결정하고 걷고 싶은 길만 선택하여 걸을 수 있다면....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까지 해 본다.
긴 오르막 끝으로 죽전고개에 올라선다.
향로산과 재약산의 갈림목이다. 묵직한 베낭을 곁에 둔 두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휴식과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얼른 재약산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저 앞으로 재약산 수미봉이 부드러운듯 유연하게 솟아 있다. 그 뒤로는 사자봉도 삐죽한다. 사자봉쪽에서 수미봉을 볼 땐 날카롭게 치솟아 험하게 보이지만 산들늪쪽에서 보는 수미봉은 온순한 모습이다. 산도 그렇듯 사람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가지 얼굴로 다가설 수도 있을 것이다.
▲죽전고개 오르기 전 전망터에서 건너다 보이는 간월산과 신불산
재약산 사자평 산들늪을 왼쪽으로 두고 애돌아 가는 능선은 한없이 평온하다.
허리만큼 자란 키 작은 억새의 하늘거리는 나부낌이 부드럽다. 사자평 억새 숲은 그리 조밀하지도, 필요 이상으로 키를 세우지도 않았으니 시종 시야가 훤히 트인다. 알프스의 초원을 걷는 기분이다. 아하, 이래서 영남알프스로구나!
사자평 산들늪엔 물매화가 한창이다. 때론 홀로이, 때론 무리지어 피어있는 물매화의 유혹에 숱제 걸음을 멈춰버린다.
여린 꽃대에 꽃잎 하나, 꽃 하나. 수수한 듯 하지만 하늘 향해 곧게 자라는 당당한 모습은 도도하기까지 하다. 그 하얀 날개짓에 취해 시간을 잊는다. 역시 뭍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만하다.
허정허정 걷던 그 길에서 산만한 등짐을 맨 사내가 길을 묻는다.
이 산자락에서 사흘째 걷고 있다는 그는 죽전마을로 내려서는 길이란다. 아마도 영남알프스 태극의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했던가, 아니 고독해서 산을 찾는다고 했던지...
큼직한 등짐은 그 사내의 삶의 무게인양 버거워보인다. 억새숲 사이로 느리게 사라지는 그의 뒷 모습이 무척 고독해 보인다.
오래전 저이처럼 이 산자락에서 머물렀던 기억들이 아슴아슴하다.
▲사자평 산들늪 억새숲 뒤로 재약산 수미봉이 봉긋하게 솟아있다.
고사리분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한길이 된 등산로는 죽전쉼터까지 이어진다.
막걸리와 도토리묵, 라면까지 팔고 있는 쉼터는 저자거리에 나선 주막처럼 분주하다. 멋진 탁자까지 마련된 쉼터엔 재약산을 향하는 사람, 이미 산행을 마치고 주암계곡, 심종태바위, 표충사로 향하는 걸음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또 맞는다.
▲죽전쉼터
▲미역취
오랫만에 올라온 재약산 풍경은 모든 것이 새롭다. 멀리 보는 풍경은 겹겹의 능선으로 포개져 아득한 그리움처럼 번진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먼 산들은 크고 듬직한 뼈대만 보인다. 실제 저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볼품없이 작고 짧은 지능선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저토록 근사한 산을 이룬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보니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자잘한 일상, 기뻐하고 절망하고 분노했던 순간순간들에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자잘한 것들이 내 삶의 근간인 것을 낸들 어쩌랴. 그렇게 소소한 것에 목숨거는 것이 우매한 내 삶이었던 것을...
어느날 문득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을 때 저 산줄기처럼 듬직한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이젠 내 걸음에 책임져야 하고 걸었던 길을 되돌아 볼 시간들이 멀지 않았다.
▲건너로 사자봉
▲멀리로는 가지산, 상운산, 운문령 건너로 문복산
▲재약산 수미봉 풍경
▲물매화, 산부추, 쑥부쟁이, 산비장이
산 아래의 풍경은 이제 완연한 갈색톤이다. 세삼 가을이 이만큼 깊어졌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오랫도록 산정에 머무르다 다시 내려선 죽전쉼터에서 막걸리 한 잔을 청한다. 누군가가 다쳤는지 코 앞에서 119헬기가 한바탕 요란을 떨다 사라지니 사방은 다시 고요하다.
이제 하산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기에 쉼터엔 등산객의 기척이 뜸하다. 거푸 두어 잔을 마셨더니 잔잔한 취기가 온 몸을 싸고 돈다. 끝내 마지막 잔을 비우지 못하고 일어선다.
가을 짧은 해는 이미 재약산 등허리에 걸렸다. 철구소 내려서는 길은 숲이 깊어 사위가 어둑하다. 어둠살이 내리는 시간에 맞춰 겨우 대로변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