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 북쪽 언저리 - (운문령-학대산-문복산-삼계리)]

 

운문령 오르는 길.
버스 엔진 소리가 힘에 겨운듯 묵직하다.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힘겨워하는 차만큼 나도 숨이 가빠진다. 산허리 한 굽이 한 굽이 굽어 돌 때마다 차는 기진맥진이지만 산아래 풍경은 고도가 높아진 만큼 근사해진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물들어 가는 들판 너머로 옅은 구름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산과들의 조화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이윽고 언양방면에서 구비구비 산길 올라 운문령에 서다. 토요일이건만 고개마루에 진을 치고 오댕이며. 먹거리를 제공하던 포장집들은 몇 집 남지 않아있고 기척은 감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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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 직전 돌탑봉에서 건너다 본 고헌산과 산내면 일대

 

운문령...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시절부터 인연이 닿았으니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닌듯 하다.
오늘은 가지산쪽을 등지고 문복산을 향한다. 낙동시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길을 따라 걸었던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그 당시엔 기를 쓰고 멀리 그리고 오래도록 걷는 것이 즐거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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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와 경주를 경계짓는 운문령 고갯마루 - 모두가 산으로 들고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만 덩그러니

 

산 빛은 이제 막 노릇노릇해 지기 시작한다. 지난 여름 그 맹렬했던 진초록의 숲터널을 빠져나와 한 템포 느린 박자로 계절은 익어간다. 산 빛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은 쾌적하다. 걸음 역시 가볍다.
오랜만에 걷는 영남일프스의 언저리. 산길은 좀 더 넓어졌고 넓어진 만큼 더 뚜렷하고 편해졌다. 큰 나무가 하늘을 가린 숲은 아늑하다. 때때로 시야가 트이면서 산 아랫동네로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과 옅은 안개에 쌓인 풍경들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한 폭의 그림이다. 내심 좀더 시야가 터진 곳을 만나면 사진으로 남길 요랑이었지만 그후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햇살이 퍼지면서 안개도 사라지고 빛의 각도도 달라져버렸다. 아쉽다. 세상살이도 산길 걷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삶에서 기회가 왔지만 그것이 기회인지 미쳐 알지 못하며 지지부진하게 살아가는 내 일상처럼...

 

완만한 능선길에서 낙동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명물 소나무도 지나친다. 문어발처럼 쳐진 여러 개의 가지를 갖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림 한 장 남기려 했으나 워낙 인기있는 녀석이라 끝내 차례를 포기하고 길을 잇는다.
완만하던 능선이 잠시 고개를 세운다. 그 길에서 예전에 없었던 갈림길을 만난다. 직진하는 된비알을 올라서면 낙동3거리인 895봉이지만 길은 어느새 왼편 산허리를 돌아 우회하는 길이 더 넓고 더 반듯해졌다. 한때 시시콜콜 산의 족보를 캐고 길을 묻던 시절의 열정이 식었으니 걸음은 자연스레 우회하는 길로 옮겨진다.
다시 능선에 올라 길이 반듯해지자 너도나도 행장속 먹거리를 쏟아낸다. 맛있는 부침개에 허기를 속이고 막걸리 한 순배로 산정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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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오름길에 만나게 되는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문복산 산행에서는 단골 포토존이다

 

능선에서 삼계리로 내려서는 지릉갈림길이 있는 964봉은 학대산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964봉이 언제 어떤 연유로 학대산이란 명찰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의 키 높이를 이름으로 내세울 때보다는 한결 자랑스러울 것이다. 산꾼들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기도 쉬워졌다.
운문령에서 문복산을 잇는 길은 영남알프스의 여느 산길에 비해 한결 유순하여 편하기 그지없다. 경상남도와 북도의 경계를 가르며 가까이로는 상운산과 쌍두봉, 오른편으로는 단석산에서 고헌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줄기를 줄곳 시야에 두고 걷는다. 간간이 멀리까지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는 저 멀리가 어디매 쯤인지를 꼽아보느라 끙끙거려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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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새로이 이름을 얻은 학대산- 정상직전에서 왼편으로 삼계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우)문복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이제 막 노릇한 가을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저 앞으로 문복산이 보이고

 

산 아랫동네 숲은 아직 무성한 초록이지만 고스락을 이루는 능선마루는 노릇노릇해지기 시작했다. 길 섶엔 구절초, 쑥부쟁이를 비롯한 가을 꽃이 한창이다.
꽃. 한때 그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꽤나 열심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꽃이름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대견스럽게까지 여겼던 날들도 있었다. 허나 어느날부터인가 관심이 멀어지고 자주 대면하지 못하는 녀석들은 그 이름도 잊었다. 머리속에서만 아슴아슴 맴돌 뿐 자신있게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이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그러하다. 보지 못하면 기억에서 멀어지고 잊혀져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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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과 산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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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의 명물 드린바위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터에 서다.

 

휘적휘적 꽃구경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문복산 고스락이다. 아직은 뜨거운 햇살 가득한 고스락엔 어른 키만한 빗돌이 새롭게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옛 정상석은 한쪽 귀퉁이에 밀려나 서러운 꼴이다. 주변으로 영남의 올망졸망한 산줄기가 키재기 하고 저 멀리로는 팔공산까지 어림된다. 그 왼편으로는 가야산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희붐하다
정상부근 너른 헬기장은 일행들의 점심식사로 한동안 왁자하다. 마침 성수씨가 이번 산행에 동참하게 되어 점심도 같이 먹고 산행내내 말벗이 된다. 요즘 한참 산의 매력에 빠져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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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 직전 삼계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는 돌탑봉 - 정상은 이 돌탑봉에서 우측으로 100여m 더 진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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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산 직전 돌탑봉에서 고헌산을 배경으로 추억도 남겨두고, 오른쪽은 문복산의 새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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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어딘지 구지 알려고 하지마라 - 그저 겹겹으로 포개진 산의 중첩이 좋을 뿐이다.


하산은 문복산 정상에서 곧장 서쪽 숲길로 접어들어 삼계리쪽으로 내려선다. 완만하게 내려서던 능선에서 한바탕 곤두박질치듯 내려서면 계살피계곡 상류다.
영남알프스에선 알음알음으로 꽤 소문난 계곡이다. 무릇 계곡이란 물이 풍성해야 제 소리를 내고 제 빛을 발하는 법이건만 긴 가뭄 끝에 만난 계살피계곡은 옹색하기 그지없다. 실팍한 물줄기만이 계곡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짧은 대숲을 빠져나와 만나게 되는 가슬갑사유적지 표석을 지나 몇 걸음이면 계곡과 사면으로 갈리는 갈림길이다. 계곡길은 이미 답습한 길이란 핑계로 사면을 따라가는 널찍한 길을 따른다. 계곡을 왼편 저 아래로 멀찌기 두고 가는 편한 길이다.  이후 길은 삼계리에 이를 때까지 계류와 영영 이별이다.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함께하던 일행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혼자 걷고 있다. 덕분에 삼계리까지의  호젓한 길은 온전히 내 몫이다. 탈방거리며 생각없이 걷는 그 길 끝에 아직도 기다릴만한 희망 하나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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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살피계곡 본류로 내려서기 전 쉬어가기 좋은 전망자리가 있다. ▲ 그 전망터에서 보면 저 멀리로 운문산이 우뚝하다.(가운데는 쌍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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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숲을 빠져 나가면 길섶으로 가슬갑사 유적지 표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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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마을 돌담엔 담쟁이 열매가 익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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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머리인 삼계2교에선 저 앞으로 쌍두봉이 우뚝하게 솟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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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어오는 길 운문댐 망향정에 들러 운영진에서 준비한 푸짐한 회로 뒷풀이 - 운문댐 건너로 보이는 특이한 모양의 억산은 언제보아도 일품이다.

 

운문령에서 문복산을 거쳐 삼계리까지는 먹고  노닥거리는 시간을 포함해도 고작 4시간 반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하루를 바치기에는 짧은 발품이다. 허나 그리 섭섭치 않다.
멀리, 혹은  오래도록 걷는 것보다는 내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소소한 것에 감탄하고 자연에 감동하며 동화되어  간다는 것이 행복한 산행이란걸 조금씩 배워간다. 
아직은 나와 함께 걷는 이가 있고, 아직도 산을 오를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2013.9.18 알프스,
약 9.1km, 4시간30분 소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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