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겨울속 봄날에 허망한 눈만 녹아 내리다]
[어떤염원]허허로운 산정 위태로운 날등에 세워둔 하얀 깃발은 어떤 염원을 담고 있을까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남은 침묵의 시간도 기약없다.
때론 통하지 못할 소통보다는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참 오랫만에 걷는 산길이다.
다시는 그 품에 들지 못할 것 같았던 산자락에 다시 섰다.
허나 가슴에 품어둔 아픔이 너무 큰 탓인지
산으로 가는 마음도 무겁고 걸음도 무겁다.
상처도 분노도 그리움도 모두 발 아래 묻어두고
더 이상 졸렬해 질 수 없음을 일깨워주는 산의 품에 무작정 안겨볼 일이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사 모두다 하찮을진데...
봄날처럼 착한 겨울
안성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는 긴 대열속에 몸을 섞는다.
오랫만의 걸음이라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걸음은 어눌하기만 하다.
등짐조차 남의 것인양 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얀 솜이불 덮고 긴 잠에 빠져 들었던 칠연계곡은
일행의 소란스러움에 깨었는지 돌돌돌~~~ 옅은 잠투정이다.
동엽령과 칠연폭포 갈림길에선
일행의 걸음에서 벗어나 칠연폭포쪽으로 몸을 돌린다.
얼어붙은 물기둥만이 폭포였음을 알리는 일곱개의 소와 일곱개의 폭포
무인지경 골짜기엔 시간마져 멈춰버린 듯 적막강산이다.
칠연폭포 삼거리로 되내려와 동엽령 향하는 길은 느긋한 오름이다.
이 길은 이미 다녀갔던 길이건만 생전 처음 맞닥드린 길처럼 길고도 멀게 느껴진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큰산, 작은산 없이 힘이 든다.
동엽령
덕유산은 동엽령을 경계로 남덕유와 북덕유로 각기 이름을 달리하지만
그 경계란 것이 칼로 무우 자르듯 물리적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사람의 삶도 그와 같아 모질게 선을 긋고 흑과 백으로 분리하거나
삶의 인연을 담박에 잘라 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덕유주릉에 올랐건만 그 유명한 덕유의 바람은 모두 어디에 갖혔는지
여전히 바람한점 없는 겨울 속 봄날이다.
자고로 겨울산행은 맵싸한 바람맛이라도 봐야 제격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착하고 고마운 날씨를 탓한다.
언젠가 만났던 겨울 덕유의 흉흉하던 바람이 그리울 지경이다.
백암봉 못미쳐부터 만나게 되는 상고대도 착한 날씨 덕분에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
상고대는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녹아내려 물방울만 뚝뚝 흘러내린다.
그나마 향적봉 인근에서야 제대로 된 상고대를 만나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멀리로 줄을 잇는 산객들 모습이 휴일 덕유산이란 밑그림에 형형색색의 선을 그어놓은 듯하다.
산도 사람이 있어서 더욱 빛나고 있다.
덕유에 서면 언제나 지리 연릉을 볼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오늘은 그리 흐린 날씨도 아니건만 지리산 자락은 가뭇하다.
근경 준경으로 보해산이며 금원,기백은 선명하건만
그 뒤편에 의당 있어야 할 지리주릉은 옅은 구름 속에 숨어 있다.
산의 중첩은 내 몸 가까이에서 점차 멀어짐으로 해서 그 채도가 엷어지고
그 끝자락이 가뭇해 질때야 비로서 풍경을 완성시킨다.
내심 덕유에 서서 일렁이는 산맥의 파도와 겹겹으로 멀어지는 산줄기에 충분히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올랐다.
그 아린 겹겹의 산줄기를 허망한 눈으로 보다가 시선의 끝이 지리자락에 닿을때
마침내 격한 감동에 못이겨 눈물이라도 찔끔 흘려줄 준비까지 하고 왔었는데...
그저 왔던 길 되짚어 눈길주며 내 비루한 걸음에 스스로 대견해 함이 고작이다.
소란스런 향적봉을 뒤로 하고 백련사 절집으로 훌쩍 내려선다.
삼공리까지 이어지는 길은 언제나 지루하고 멀다. 발도 고달프다.
이름값하는 구천동계곡이지만 소복히 쌓인 눈이 계곡을 덮고 있으니 그저 그런 그림의 연속일 뿐이다.
눈 녹아 질퍽거리는 연속적인 전경의 길에서 마음은 저만치 앞서 가지만
피곤한 걸음이 앞선 욕심을 다독인다.
구천동 깊고깊은 골짜기는 겨울 속 봄날에 허망한 눈만 녹아 내린다.
2009.1.31
칠선계곡-동엽령-향적봉-삼공리
글 쓰시는 분이신가요?
너무 글을 잘쓰시는 것 같읍니다,
풍부한 생각의 영역과 이를 옮기는 탁월한 솜씨가 부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