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도 젖고, 몸도 젖고, 마음도 젖고]
시종 앞을 가리는 안개로 답답하기만 했던 걸음.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산행에는 그리 좋지 못한 조건이다.
이번 정각산 산행은 마치 내 주변의 어지러운 현실처럼 어둡고 습했다.
내리는 비에 젖는 것은 숲만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비에 젖는다.
이미 젖어버려 더 이상 젖을 수 없는 몸, 헤질대로 헤져 더 이상 추스릴 수 없는 마음 위로 무심한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는 산행 내내 걸음을 무겁게 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저 어둑하고 습한 숲 속 깊은 곳에 무언가 잡을 수 있는 가닥이 있을까 하여 비내리는 안개숲을 무작정 걸었다.
몸이 비에 적응하자 비로서 숲길은 아늑한 그리움이 번진다.
산행 후반부 비로 불어난 물의 풍요로 위용을 자랑하는 정각폭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정각산은 예전보다 더 묵은 듯한 느낌이었다. 영남알프스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산꾼들이 많긴 하지만 정각산 일대는 여전히 변방으로 남아 있음이다.
남명리에서 도래재 오르는 길, 예전엔 군데군데 비포장이 섞여 있었으나 이젠 말끔히 포장되어 있다.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 이 길을 오르다 타이어 펑크로 인해 산문에 닿기도 전 8월 염천에 비지땀을 흘렸던 기억이 아슴하다.
▼ 동물 이동통로가 새로이 설치된 도래재
산 아래는 빤한 맑음이지만 올려다 보이는 산자락은 하얀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예상대로 산마루는 짙은 안개만 자욱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토해낼 듯 잔뜩 웅크리고 있는 태세다. 한바탕 우중산행을 피할 수 없을 것같다. 도래재에서 동물 이동통로로 올라선 후 북서쪽 산자락을 파고든다.
새벽에 내린 비로 숲은 젖어있다. 때가 한여름이고 보니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산길을 점령하고 있으니 길은 자연히 잡풀에 덮혀 묵어있다. 쉬엄쉬엄 걷는다. 길섶 여름풀꽃이 발길을 잡지만 애써 찍은 사진이 모두 엉망이다. 아직 카메라에 익숙지 못함이다.
35분 가량 수더분하게 올라서자 영산(구천산)과 정승봉 주능선인 갈림길 안부인 정승고개에 올라선다.
산꾼들은 베낭을 벗어두고 영산을 올랐다가 되내려 오겠다고 일찌감치 올라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고갯마루엔 베낭들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영산에 올라도 어짜피 안개 자욱한 산에서의 조망은 없을 것이다.
일행을 뒤로 하고 혁달씨와 함께 정승봉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길이 완만하니 걸음은 여유롭다. 길가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며느리밥풀꽃이 지천이다. 저 꽃이 피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버섯시즌이 시작됨을 알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잡버섯만 더러 보일뿐 아직은 이르다.
정승봉에서 쉬고 있는 동안 뒤따르던 선두 일행이 도착한다. 일행과 뒤섞여 다시 안개숲으로 빠져든다.
실혜봉은 허리길을 따라간다. 오랫동안 참아주던 하늘은 기어이 비를 뿌린다. 한두방울 떨어지던가 하더니 채 우중채비를 하기도 전 소나기로 변한다. 우중채비라 해봐야 작은 우산 하나다. 거칠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긴 턱없이 부족하다.
비내리는숲- 실혜산 산허리를 에둘러가다▶
일행은 이미 멀찌감치 앞서 갔으니 음습한 숲길을 혼자 걷는다. 안개 쌓인 숲은 어둑하고 한여름이지만 비 내리는 숲은 서늘하다. 무심한 비는 새벽비 내린 자리 위로 또 쏟아진다. 숲이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몸이 젖어들자 마음도 젖어든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비 내리는 숲은 아득하다.
예전 똘방재로 부르던 자리는 끝방재란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지만 쏟아지는 비의 기세는 더욱 거세지니 마땅한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일부는 내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충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지만 그냥 정상 직전의 폐광터까지 진행하기로 한다.
식사시간을 놓쳐 허기가 지고 보니 걸음은 쉬이 지친다. 정각산 직전 폐광터에 닿았다. 이정표는 정상까지는 160m를 알린다. 함께 걷던 몇몇 일행과 뜻을 모아 일단 폐광터에서 식사를 한 후 정각산에 오르기로 한다. 예전 기억으로는 이 갈림길에서 폐광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로 기억되었지만 실제 내려가 보니 꽤 먼 거리였다.(3~4분 소요)
발품은 좀 팔았지만 비를 피한 폐광터에서의 식사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식사 후 정각산 찍고 내려왔더니 일행은 모두 흔적을 감춘 후였다. 폐광에서 하산길은 둘로 갈린다. 앞선 걸음들은 어느 쪽으로 하산 길을 잡았는지 알 길이 없다. 뒤에 남은 일행 서너 명은 동행이 되어 처매듬골로 하산길을 잡는다.
◀불어난 물의 풍요로 그 진수를 보이고 있는 정각폭포
폐광굴 바로 앞 돌무더기가 깔린 위태로운 길을 내려와 능선 사면을 돌아간다. 길은 사면을 애두르는 임도 수준의 넓은 길을 따르다가 왼쪽 지능선으로 내려서야 한다. 자칫 넓은 길만 따라가면 범도리쪽 능선길로 접어들게 된다.
폐광터에서 15분 정도면 발 아래로 구천리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터다. 건너편 산자락은 여전히 안개에 가려있고, 산 아래는 운무가 제 멋대로 산그림을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한다. 전망터 아래로는 천길 벼랑이다. 그 벼랑 아래에 정각폭포가 숨어있다.
전망터 옆 위태로운 바윗길을 내려와 산허리 길을 따라 계곡 쪽으로 다가서면 정각산이 자랑하는 정각폭포를 만날 수 있다. 폭포는 등산로에서 계곡쪽으로 20m 정도 더 올라가야 한다. 여름철이면 숲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도 쉬울 것이다.
정각폭포는 비가 온 직후에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폭포다. 골이 깊지 않고 보니 항상 건폭을 이룰 때가 대부분이다.폭포 주변으로는 흩어지는 물보라의 위세가 대단하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흔적을 남겨보려 애써보지만 흩어지는 물보라가 렌즈를 가려 제대로 된 그림 하나 남기지 못한다.
물의 풍요로 불어난 계곡은 곳곳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소용돌이 치고 있다. 조금만의 낙차만 있으며 어김없이 폭포가 된다.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내리는 비 덕분에 처매듬골의 진수를 만끽하니 오히려 비오는 날씨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험악한 기세로 달려드는 물길을 두어 번 건너 계류를 따라 내려오면 녹색산장 앞으로 이어지는 임도길이다. 이후 불어나 소용돌이 치는 정승골 계류를 따라 내려선 구천마을회관에서 산행을 마친다.
다시 내려온 산 아래 마을은 비 그치고 햇살 쨍쨍한 빤한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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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재에서 동물이동 통로로 올라선 후 북서쪽 숲으로 들어선다.
반대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재약산 방면이다.
▲ 동물이동 통로 상단엔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현위치를 추적하는 안내판이 있다.
▲ 정승고개
▲ 안개숲을 걷다.
▲ 길섶 풀꽃에 눈길 주지만 제대로 된 사진은 없다.
새벽비에 적어 있는 엉겅퀴를 비롯하여 며느리밥풀, 바위채송화, 수정란풀
▲ 예전에 없었던 표석이 정승봉의 주인이 되었다.
▲ 전망터에 섰지만 보이는 것 답답한 안개뿐
▲ 한없이 젖어들다.
▲ 폐광터 상단에 섰지만 역시 조망은 꽝
▲ 폐금광굴에서 비를 피해 점심식사를 마치고
▲ 정각산도 올라보고
▲ 처매듬골 상단 정망터에 서다. 발 아래 구천마을.
마을회관 앞에 우리를 기다리는 파란색 한동버스가 빤하게 내려다 보인다.
▲ 정각폭포
▲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보라의 기세가 대단하다.
▲ 불어난 물길을 건너고
▲ 또 건너고
▲ 산행날머리인 구천마을은 빤한 맑음 이지만, 산머리은 여전히 안개에 쌓여있다.
*일시: 2012.8.22(한마음 44명)
*걸은길: 도래재-정승고개-정승봉-정각산-처매듬골-구천마을
[산행상세]
09:37 도래재 출발(동물통로 상단)
10:12 정승고개 10:54 정승봉 13:45~14:51 폐광터(식사후 정각산 왕복)
15:07 전망터 15:15 정각폭포 16:20 구천마을회관
=== 이정표거리: 12km, 총소요시간: 6시간 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