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정원 꽃무리에 취해...[지리산 반야봉]
*어디:성삼재-노고단-반야봉-화개재-뱀사골-반선(9시간 소요)
*언제:2009.8.19(한무리)
▲노고단 오르는 안개 휩싸인 길은 천상의 화원을 오르는 길이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나무데크를 따라 안개 숲 헤쳐 노고단을 오른다.
하늘정원은 지천으로 피어나는 여름 야생화로 온통 꽃밭이다. 천상의 화원이 바로 여기다.
사방 가득 농밀한 운해가 능선을 넘나드는 천상의 화원에선 세상을 잊는다.
꽃무리에 취해 허정거리는 걸음은 발 아래 섬진강이 보이지 않아도 섭섭할 겨를이 없다.
지난 몇 날 이 산정을 노랗게 물들였을 원추리 시들해진 꽃자리엔 쑥부쟁이, 구절초, 이질풀등 가을 꽃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다.
그렇게 깊어진 계절 뒤로 가을은 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산행은 성삼재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리산 서부쪽 일부인 노고단과 반야봉을 거쳐 뱀사골로 내려서는 적당한 하루 일정이다.
사방이 운해로 가득찬 성삼재에선 어느 쪽으로 들어서야 할지 방향감마져 오락가락이다.
안개 사이로 언뜻 모습을 내비치는 노고단 방송기지국 탑을 겨냥하여 휴게소를 뒤로 한다.
노고단을 향하는 넓은 관광도로는 오가는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뒤섞여 소란스럽다.
샌달에 생수 한 병 달랑 들고 오르는 단촐함이 있는가 하면, 지리종주를 꿈꾸며 묵직한 등짐으로 무장한 등산화도 보인다.
샌달, 등산화, 구두, 운동화가 뒤엉켜 오르는 도로는 지리산을 오른다는 신비감은 떨어지지만 활기에 가득하다.
넓직한 도로는 한 줌 그늘이 귀하다. 정수리에 꽂히는 짱짱한 햇살을 받아내며 여름과 한판 승부를 겨룬다.
길 섶 그늘엔 진분홍으로 수줍게 피어나는 물봉선이 지천이다.
그렇게 30여분 가까이 올라 화엄사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 후 돌계단을 올라서면 곧 무넹기에 닿는다.
시원한 물이 길 옆 수로를 타고 풍부하게 흐른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곳이 바로 무넹기.
해발 1300m 고지대의 물길을 바꿔 버린 인공수로엔 달궁계곡으로 흘러야 할 물이 능선마루를 넘어 화엄계곡이 되고 섬진강을 향해 무심하게 흘러간다. 스스로가 흘러야 할 운명이 뒤밖인 줄도 모른 채...
물가 그늘엔 청년 두 명이 흐르는 물에 땀을 식힐 뿐, 그들 또한 물흐름엔 무심한 듯 하다.
▲안개낀 성삼재 휴게소 - 서부지리산을 오르는 관문이다.
▲노고단 고개 주위로만 빤한 맑음이다.
▲하늘정원 언덕마루의 이종화님.
이질풀 가득히 핀 돌길을 따라 올라서면 노고단 대피소.
대피소 입구로는 노고단 캐릭터가 된 마고할매가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
대피소 한켠에서 한 숨 돌리고 10여분 올라서면 노고단 고갯마루.
코 앞으로 반야봉이 우뚝 솟아 있지만 중허리부터 감싸 안은 운무가 그 둥그스름한 봉우리를 죄다 삼키고 있다.
노고단 역시 안개 속에 갖혀 있기는 매 한가지다.
아마도 세인들의 눈을 피해 노고할매가 반야를 만나 은밀한 데이트라도 즐기는 모양이다.
노고단 정상까지 말끔하게 다듬어 놓은 데크를 따라 오르는 길은 안개에 휩싸인 몽환적 그림이다.
울타리 좌우로는 원추리, 동자꽃, 이질풀, 모시대, 쑥부쟁이, 미역취...
눈으로 확인되는 종류만도 무려 30여종에 가까운 다양한 여름 야생화가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다.
가히 이 길을 하늘정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 길에서 꽃에게 무릎 꿇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자연과 하나되니 하늘정원에서는 사람도 꽃이 된다.
거대한 돌탑이 정수리를 지키고 있는 노고단은 사방 자욱한 안개다.
바로 앞으로 응당 보여야 할 반야봉도, 천왕봉도, 섬진강에 멧부리를 담그는 왕시리봉능선도 오리무중이다.
노고단에선 운해로 인해 지리산이 더욱 아득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섬진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서서 보이지 않는 섬진강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눈에 보이는 것이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일 수도 있음을.
안개 휩싸인 노고단. 옅은 바람 꽃무리 흔드는 이 산정에서 몸 굽혀 자연의 사치를 만끽하며 오래도록 쉬고 싶다.
▲원추리와 둥근이질풀
▲섬진강 물돌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엔 허망한 운해만
머물고 싶은 노고단을 뒤로 하고 임걸령을 향한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 이어지는 길은 지리산의 험난한 주능선 중에서 가장 착한 길이다.
숲이 깊어 이 능선, 저 골짝 곁눈질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냥 허정허정 걸으며 가까이에 눈길 줄 뿐이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에 가끔 허리 숙이는 일이 전부일 뿐이다.
진범. 비비추, 마타리, 짚신나물, 산수국, 노루오줌, 며느리밥풀, 흰여로...
모두 이름을 불러 줄 수는 없지만 이미 면식있는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또한 산길 걷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아쉽게도 그 많은 야생에서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것이 몇 되지 않는다.
앞서 걷던 최호우형님께서 선학초라고도 불리는 짚신나물의 옛 이야기 한자락을 들려준다.
지천으로 눈에 밟히는 작은 풀꽃 하나에도 그럴 듯한 사연 한자락씩 품고 있을뿐더러 꽃이름을 붙인 재치에 절로 탄복이다.
물 맛 좋기로 유명한 임걸령 샘터에서 습관처럼 목을 축인다.
임걸령 지나 노루목 반야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다소 팍팍해진다.
노루목에서 지리주릉을 벗어나 반야봉까지는 고작 1km 남짓한 거리지만 40분이나 소요되었다.
여름 한 낮 더위에 지친 탓도 있었지만 곳곳으로 앙증맞게 피어난 야생화에 발길 멈춘 시간도 제법 길어진 탓이다.
산오이풀, 범꼬리, 곰취, 긴산꼬리풀... 헤아릴 수 없는 야생화의 유혹에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동자꽃과 짚신나물
천왕봉에 이어 지리2봉으로 통하는 반야봉은 천왕봉의 소란스러움과는 대조적으로 한산하다.
우리 일행외에 다른 산객들은 보이지 않으니 한결 여유롭다.
운해에 쌓여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노고단이 꽤나 멀어보인다. 천왕봉쪽은 여전히 감감하다.
일행은 가야할 길을 잊은 듯 이곳 반야봉에서 무려 30분이나 머무르며 망중한에 빠져든다.
반야봉에서 곧장 북으로 뻗은 능선을 타고 내리면 심마니능선을 타고 뱀사골 입구인 반선쪽으로 내려서거나
중봉 아래 묘함대(암)를 거쳐 이끼폭포로 내려설 수 있건만 아쉽게도 그 길은 비지정탐방로 즉, 금단의 길이다.
마음에는 두고 있지만 쉬이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욕심의 길이다.
낯선 길에 대한 호기심은 습관처럼 금줄을 넘어 중봉 직전의 헬기장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리산은 워낙 규모가 큰 산이라 갈래 친 능선과 골짜기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덩치에 비해 직접 걸어볼 수 있는 길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주능선과 몇몇 골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통제된 길이다.
여타의 지자체나 시립, 도립공원들이 위험지역에 안전시설을 갖추어 좀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국립공원, 특히 지리산국립공원은 유독 통제와 감시가 심한 곳이다.
생태계복원이란 그럴 듯한 이론을 내세워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많은 모순과 주먹구구식 이론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휴식년제 기간이 도래되면 다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며 스스로가 정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연환경보호를 운운하지만 최근 들어 남원에서는 뱀사골에서 이곳 반야봉까지 케이블카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고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야봉-묘향대와 이끼폭포로 가려면 저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반야봉 오름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산오이풀
반야봉에서의 긴 휴식을 뒤로 하고 경남, 전남, 전북을 가르는 꼭지점이 되는 삼도봉으로 내려선다. 민주지산에 있는 삼도봉의 유치찬란함과는 대조적으로 단촐한 표식하나만 있으니 오히려 정감 가는 곳이다.
남으로 몸을 낮추고 경남과 전남의 경계를 잇는 불무장등능선은 온통 안개에 쌓여 한 치 앞도 허락하지 않는다.
삼도봉에서 화개재에 이르는 길은 긴 나무계단의 연속이다.
옛날 남원쪽 사람들이 화개장으로 가가 위해 넘나들었다는 화개재 너른 풀밭에 앉아 행장 속 남은 먹거리를 펼쳐 놓고 길을 잊은 채 긴 휴식에 빠져본다.
화개재에서 뱀사골을 따라 날머리인 반선까지는 9.2km.
20리가 훨씬 넘는 긴 계곡길이라 지루한 감도 있지만 지리산의 개방된 골짜기 중에서는 계곡미가 뛰어난 곳이라 눈이 호사한다.
▲화개재 - 지리산 주능선을 버리고 왼편 뱀사골로 내려선다.
▲옥수 흐르는 뱀사골
화개재에서 돌길을 따라 50여분 내려서면 예전 보부상들이 하동에서 소금을 짊어지고 화개재를 넘어오다 빠졌다는 간장소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소와 담이 연이어 나타난다.
소원 들어주던 고승의 영험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재승대
병풍같은 바위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흐른다는 병풍소
바위틈 물길이 병을 닮았다는 병소,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의 뱀소
뱀이 허물을 벗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가다가 떨어져 자국이 생겨나고 그 자국 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같다는 탁용소
용이 승천하기 위해 몸부림쳤다는 요룡대...
저마다의 그럴 듯한 전설 한 자락씩 간직한 명소가 지루한 발품을 보상해 준다.
허나 계곡산행이란 자고로 탁족이라도 즐겨야 제격이건만 뱀사골은 탐방로를 제외한 물가 지역은 휴식년제에 묶여 있어 계류가로 내려설 수 없음이 아쉽다.
탐방로 옆 울타리를 넘어서면 "벌금"이란 문구가 겁을 주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저 수려한 계곡미를 보고 물 흐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일행 중 한 분께서 무릅이 불편해진 관계로 하산시간이 다소 늦어지긴 했지만 덕분에 그 아름다운 계곡미를 쉬엄쉬엄 감상할 수 있었으니 그 분께 감사해야 한다.
수정처럼 맑은 옥수 흐르는 뱀사골은 여타의 지리산 계곡이 거칠고 험난한데 비해 그윽한 맛이 있다.
추색 깊어진 날 다시 찾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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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대피소와 노고단 오르는 나무데크길
▲동자꽃, 원추리, 이질풀, 범꼬리, 곰취꽃 어우러진 천상의 꽃밭
▲안개 가득한 노고단 전경
▲노고단 표석
▲안개가 잠깐 선심쓰자 건너로 반야봉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이질풀, 마타리, 모싯대, 며느리밥풀꽃
▲진범, 흰여로, 곰취, 비비추
▲경남, 전남, 전북을 가르는 삼도봉 - 뒤로 반야봉쪽
▲산수국, 긴산꼬리풀, 물봉선, 미역취
▲간장소
▲깊 섶 미니이끼폭
▲병소
▲탁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