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
*봉강재-봉좌마을 도농교류센터-선돌메바위-승마공원-새마을운동 발상지기념관(약4.5km/2시간)
나눔활동으로 봉좌산을 찾다.
봉강재를 시작하여 봉좌산 정상에 오른 후 새마을운동 발상지기념관으로 내려오는 약 8km, 4시간의 산행계획이었지만,
몹쓸 지병이 도지는 바람에 무의로 돌아가고, 봉좌산 기슭만 어슬렁거린 하루.
이젠 모든 신체기관이 망가지는건지 도무지 성한 곳이 없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곤두박질 치더니, 4시간 정도의 산행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악화되다.
산 속으로 사라지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부러운 맘으로 보내며 마을길을 걷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관평쉼터
고지리 관평마을이다. 파평윤씨 시조묘가 있는 봉강재 진입로를 알리는 빗돌이 있다. 뒤로 보이는 정자는 관평쉼터
봉강재까지는 승용차는 진입이 가능하지만 우리 일행은 대형버스를 이용했으므로 진입이 불가하여 여기서부터 걷는다. 약 500m 정도 마을길을 따라들어가야한다.
▲쉼터 옆 공터엔 "고려태사파평윤공신도비"라 적힌 빗돌이 있다.
파평윤씨의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을 기리기 위한 빗돌이다.
빗돌 왼편으로 산으로 진입하는 소로길이 보이지만, 봉강재로 가기 위해선 마을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관평마을에서 봉강재 가는 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봉좌산
▲관평쉼터에서 10여분 마을길을 따라 오르면 봉강재 입구 초입엔 마치 수문장처럼 비스듬히 자라는 소나무가 있고, 그 뒤로 봉강재 홍살문이 맞는다.
▲홍살문과 봉강재 전경
▲봉강재 안내판
*봉강재(鳳岡齋)- 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제201호,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 : 893~973)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1751년에 창건한 재사(齋舍)로서 28세손(世孫)인 윤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안동부사)로 재임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한 후 27세손 윤동도(尹東도)가 경상감사(慶尙監司) 재직시(1762년) 수축(修築)하고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尹光顔)과 안동부사 윤성대(尹聲大)에 의해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였다.
태사공(太師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하여서는 고려 왕건의 막료(幕僚)가 되어 고려 건국(建國)과 국가기반을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공(公)은 91 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고,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 시킬 때와 신라 경순왕을 귀순 시킬 때에 공이 컸으며,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하여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삼국통일 후 건국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삼중대광(三中大匡) 및 태사(太師)의 관직이 내렸다.
그 후 944년(혜종 1년)에 혜종(惠宗)이 공(公)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는 한편 공의 아들 선문(先文)을 인질로 하여 개경에서 봉직(奉職)케 함에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게 된다.
30년 재임 기간 중 한 번의 반란도 없이 이역땅 경주에서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973년(광종 24년) 81세를 일기로 결국 임지(任地)에서 일생을 마치니 신라유민(新羅遺民)들은 공의 유덕(遺德)을 흠모(欽慕)하여 이 곳, 금닭이 알을 품은(금계포란지형 : 金鷄抱卵之形) 형상의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丘峯山) 아래에 예장(禮葬)하였다.그러나 이 묘소는 후손이 천리 원거리에 있었기에 실전 직전에 이 지방의 토호(土豪) 이하지(李廈?)가 전래하던 묘비를 동강내어 땅속에 파묻고 투장(偸葬)을 감행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조 연간에 이르러 경주 종인 참봉 도(燾)가 전래하는 야설에 의하여 이를 탐지하고 요로에 알렸더니 당시 영부사 지완(趾完)과 판부사 지선(趾善), 판서 헌주(憲柱), 선지 봉조(鳳朝), 영장 봉정(鳳廷)과 경주부윤리(慶州府尹里) 등이 힘을 모아 심묘에 전력하였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다가 영조 13년(1737년)에 양래(陽來)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7일간에 걸쳐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쳐 묘비 동강을 발견함으로써 확증을 얻어 비로서 심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곧 봉분을 개축하고 석물(石物)을 다시 다듬어 세웠다.
그 후 1751년 광소(光紹)가 재실(齋室)을 창건하고 봉서암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승려를 상주시켜 묘역을 수호케 하다가 수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봉산 아래 송림이 울창한 곳에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왕릉이라 칭하기도 한 큰 묘소 동측에 위치한 봉강재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정면에 봉루암이라는 현판과 재실루 상단에 봉강재ㆍ태사공분암(鳳岡齋ㆍ太師公墳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봉강재는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로 평면구성에서 독특하고 치목수법이 우수하며, ㄱ자형 팔작지붕에 접처마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평면구성은 ㄱ자형으로 타지방의 일반적인 평면과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깨끗한 감을 주고 유지관리에 세심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정평주초(定平柱礎)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운 정면 6칸, 측면 4칸의 익공식 3량가(樑架) ㄱ자 팔작와가(八作瓦家)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상으로는 통문 5칸의 온돌 강당 전면에 툇마루를 놓고 우측에 중문의 원로인이 거처하는 고문실이 온돌 2문으로 연립하고, 그 전면에 통문 루가 강당 우측 ㄱ자 평면 끝에 자리하고 있다.강당의 좌측단 온돌 1칸은 1977년 보수할 당시 부엌칸을 개수 변경한 것이다. 강당 천정은 고미반자로 처리하였고 루(樓)는 처마도리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이용하여 원형 종도를 받는 3량(樑)을 채택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쓰고 도리도 모두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주요 구조부재(構造部材)의 치목(治木)은 주로 도끼나 자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사 전면 좌우측에 동서재는 195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구조적으로 별다른 특색이 없고 각주에 납도리를 사용한 홑처마 박공와가로 구성되어 있다.재사(齋舍) 우측의 회의실은 1981년 신축한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造)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와가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통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포항시 기계면 홈페이지==
▲봉강재 들어서기
봉강재는 한마디로 말해서 파평윤씨 재실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ㄱ"자형의 부속건물들이 나타난다.
건물 정면에는 1752년 처음 건립 당시 붙인 봉루암이라는 현판과 재실이 있는 누각 상단에 봉강재.태사공분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파평윤씨 서당인 강학당
▲언덕 높은 곳에 있는 태사공 묘역
▲봉강재 전경
▲봉강재를 둘러보고 바로 앞 산기슭로 접어들면 봉좌산 올라서는 들머리가 있다. 정상까지는 3.5km
▲산길 진입로 초입 - 봉좌산 숲길을 조성하면서 모든 초입은 이런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일행은 모두 저 길로 우루루 올라서고 혼자 남다. 그들처럼 건강하게 걸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지 세삼느끼며 피식~웃다.
▲혼자 남아 저 쉼터에서 20여분 죽치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휘감아돈다. 한기를 느낄때쯤에야 몇 걸음 움직여 본다.
▲일행들이 올라섰던 길을 잠시 올라보다.
길은 푹신한 가마니를 깔아 놓아 부드럽다. 잠시 올라서자 길은 낮은 산봉을 넘어 저 아래로 향한다. 한동안 서성거리다 되내려 오다.
▲다시 봉강재 앞 등산로 초입으로 내려와 도농교류센터방향의 넓은 길을 따라 든다.
몇 걸음 걷지않아 왼편으로 꺽어내리자 "돌막골"이란 안내판이 반긴다.
▲도농교류센터까지는 300m, 이 길은 아마 봉좌산 기슭을 이어가는 올레길형태로 꾸며진 듯하다.
▲과수원 사이를 굽어도는 길은 이렇게 불규칙한 작은 벽돌도 꾸며놓았다.
▲봉좌마을 도농교류센터 옆 쉼터 - 봉좌산 숲길 종합안내판이 서 있다.
도농교류센터는 예전 폐교가 된 기남초등학교를 포스코 협력회사수련원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도농교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나뭇재로 올라 봉좌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의 출발지로 할용되고 있다.
▲봉좌산 유래
▲봉좌산 숲길 종합안내판
포항시는 산림청의 지원을 받아 23km의 숲길을 조성하여 자연유산을 연계하여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봉좌산 숲길을 조성하였다.
▲도농교류센터에서 봉좌산 기도원방향의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 치동마을에서 승마공원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치동(致洞,治洞)은 봉좌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중간에 위치하여 예부터 봉계라고도 불렀다 하며, 1637년 경주김씨 기계 입향조인 김언헌(金彦憲)공이 칡숲을 치고 마을을 일구었기에 벌치동(伐致洞)이라 하던 것을 간단히 치동이라 하였다.
분옥정(噴玉亭)과람덕재(覽德齋),봉좌산기도원이 있다. 마을어귀 당산목에서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논 한가운데로 봉계리고인돌
선돌메바위 가기 전 왼쪽으로 논 한 가운데 봉계리 고인돌군이 있다. 고인돌 주변으로 당산나무 세 그루가 있다.
▲당겨본 봉계리 고인돌군
폰카라서인지 줌인을 하니 촛점이 맞지 않았다.
▲선돌메바위 초입에 있는 마봉산 달맞이길 안내판
▲선돌메바위
마봉산 올라서는 초입에 있고 시멘트길에서 잘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길을 위로 선돌메바위가 보인다. 몇 걸음 되지않으므로 올라가 본다.
선돌메바위 뒤 계단길로 올라서면 마봉산을 거쳐 봉좌산으로 연결되는 숲길이 잘 정돈되어 있다.
▲선돌메바위 안내판
옛날 치동마을에 외아들과 같이 사는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가 중병을 앓게 되었다. 아들은 약을 구하라 집을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늙은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있는 이곳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기다리다 선 채로 굳어 돌이 되어 '선돌메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선돌메에서 큰 구렁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약을 구하라 갔던 아들이 돌아와 구렁이로 변하여 선돌메를 지키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포항승마공원
▲도농교류센터에서 새마을운동 발사이 기념관까지는 통통통길로 명명. 의사소통, 만사형통, 운수대통
▲고척 - 여기서도 마봉산 올라가는 길이 있다.
고척의 지명유래는 300여 년 전 박춘우(朴春禹)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봉좌산정바위를 봉좌암이라 이름하였으며, 마을에서 바위를 쳐다보면 앞산인 마봉산(馬峯山) 허리위로 한 자 정도 솟아 보인다 하여 고척/고지뱅이/고두 (高頭)뱅이라 불렀다 전한다.
▲와지(瓦旨)골 이정표
암정리 남서쪽에 위치하며 대문닫이 논이란 곳에 옛날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연유하여, 또는 지형형이 기왓장같아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정월보름에 자연부락 단위로 동제(洞祭)를 지낸다.
▲봉좌산 기슭을 따라 걷는 통통통길은 대부분이 농수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용말바위 입구 - 아직도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까지는 1.5km, 에휴~ 힘들어!!!
▲계속되는 농수로를 따라
▲통통통 길
▲여기도 구제역의 여파가...
▲휴~ 다왔네.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새마을운동 발상지는 한때 포항 문성리와 청도, 두 지자체가 발상지의 진의를 두고 이수가 되었는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은
조국근대화를 이끈 선배지도자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과 역사를 먼 훗날 후세들에게 생생하게 전하여 주고자 건립, 자라나는 세대들에 대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함은 물론 관광자원화를 통하여 주민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자 설립.
▲내부
전시관은 2층 구성으로 1층은 희망의 빛이라는 테마로 환영공간, 시간의 터널, 희망의 빛 발견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희망의 땅이라는 테마로 새마을운동당시의 옷들을 입어볼 수 있고 여러가지 형태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기념관 입장은 무료이며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 관람이 가능.
▲문성리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방문하여 비교행정회의에서 "전국의 시장 군수는 문성동과 같은 새마을을 만들어라."고 하셨다고 하네요.
▲인증샷은 여기서...
▲추억의 양은도시락...
중학교때까지 저 도시락을 사용했던 기억이
▲ 새마을운동은 1971부터
한 시간 가량 기념관을 어슬렁 거렸지만 단 한사람의 관람객도 만나지 못했다.
▲새마을 인성교육 체험관
▲기념관 저 앞으로는 보이는 문성리 고인돌
▲문성리 고인돌
문성리 마을 앞 동북쪽을 향해 자리한 선돌바위의 내력은 선사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며 기록된 문헌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주로 전해오는 사연을 적어보면 2세기 후반경 중국 진시황제 치정시에 만리장성을 쌓고 역사에 참여한 이름 모를 여장군이 치마폭에 싸서 가다가 성이 완성되었다는 전달을 받고 지금의 자리에 두고 갔다는 전설같은 사연이 이어져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고학자 역사유물탐사팀들이 수없이 다녀 갔으며 모두가 선사시대 고을 수장의 지석묘가 확실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동리가 형성되면서 동리 수호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15일(대보름) 자시(子時)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동리의 안녕과 태평을 비는 동제의 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식수한 장본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높이 12m, 나무둘레 3.3m 되는 삼백여년생 팽나무(귀목)인 당상목이 자라고 있다. 영일군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인돌을 지키는 300년 된 팽나무는 보호수로 지정
▲문성리 신석기 고인돌 안내판
▲한 번더...
▲흔적
*봉강재-봉좌마을 도농교류센터-선돌메바위-승마공원-새마을운동 발상지기념관(약4.5km/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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